

1화. 세 딸 중 둘째
세 딸 중 둘째라는 자리는 참 묘하다.
첫째처럼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것도 아니고, 막내처럼 무조건 귀여움을 받는 자리도 아니다.
언니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우다가도, 동생 앞에서는 갑자기 아는 척을 해야 한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말은 제법 자신 있게 했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를 때가 많았다.
그래도 둘째는 이상하게 눈치가 빨라진다.
언니가 엄마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면 ‘아, 저건 하면 안 되는구나’ 하고 슬쩍 배우고, 막내가 뭔가를 달라고 조르면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 하고 또 배운다.
그러다 보니 둘째는 직접 부딪혀 배우는 것보다 옆에서 보고 익히는 일이 많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부터 사람을 꽤 많이 보고 살았던 것 같다.
누가 기분이 좋은지, 누가 조금 삐쳤는지, 엄마가 바쁜지, 언니가 예민한지, 막내가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은지.
말을 하지 않아도 분위기를 슬쩍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성격은 나중에 요리를 할 때도 그대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 먼저 표정을 본다.
‘맛있나?’
‘간이 괜찮나?’
‘저 사람은 이 반찬을 좋아하나?’
한입 먹고 고개를 끄덕이면 마음이 놓이고, 숟가락이 한 번 더 가면 속으로 괜히 뿌듯해진다.
아마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다 비슷할 것이다.
“맛있어요.”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우리는 채소를 씻고, 썰고, 볶고, 끓이고, 또 접시에 예쁘게 담는다.
나는 어릴 때부터 먹는 사람의 표정을 보는 것이 좋았다.
우리 집에는 세 딸이 있었지만 입맛은 셋 다 달랐다.
같은 밥상 앞에 앉아도 누군가는 국부터 먹고, 누군가는 고기 반찬에 먼저 젓가락이 갔다.
나는 그런 차이가 재미있었다.
똑같은 음식인데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별로라고 한다.
어린 마음에는 그것이 참 신기했다.
“이게 이렇게 맛있는데 왜 안 먹지?”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싫어하면 이해가 안 됐다.
지금은 안다.
사람의 입맛에는 정답이 없다.
내가 좋아한다고 모두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싫다고 모두가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요리는 사람을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누가 매운 것을 잘 먹는지, 누가 짠맛을 싫어하는지, 누가 고기를 좋아하고 누가 채소를 더 좋아하는지.
그런 작은 것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차린 밥상은 조금 다르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그 한마디가 음식보다 더 맛있을 때가 있다.
나는 세 딸 중 둘째로 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것을 배웠던 것 같다.
가운데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언니에게는 동생이었고, 동생에게는 언니였다.
어떤 날은 막내 편을 들었다가 언니에게 핀잔을 듣고, 또 어떤 날은 언니와 한편이 되어 막내를 놀리기도 했다.
세 자매가 늘 사이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사소한 것으로도 꽤 진지하게 다퉜다.
옷 하나 때문에 싸우고, 누가 먼저 쓰겠다는 것 때문에 삐치고, 분명 내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보면 누구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물건도 있었다.
자매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싸울 때는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싸워도 조금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다.
“너 이거 먹을래?”
그 한마디에 전쟁이 끝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자매 사이에도 음식은 꽤 자주 평화협정을 맺어주었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혼자 먹기가 어렵다.
한입 먹다가도 옆 사람에게 슬쩍 내민다.
“이거 맛있어.”
그렇게 다시 말이 시작된다.
나는 지금도 그런 순간을 좋아한다.
어색했던 사람들이 음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처음 만난 사람들이 “이거 맛있네요”라는 말로 가까워지는 순간.
그래서 아마 요리를 오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음식에는 사람을 조금 부드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또 하나 어릴 때부터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예쁜 것을 좋아했다.
그냥 예쁜 것이 좋았다.
분홍색 리본도 좋았고, 반짝이는 소품도 좋았고, 귀여운 물건도 좋았다.
비슷한 것 여러 개를 놓고 고르라고 하면 나는 자연스럽게 조금 더 화사한 것에 손이 갔다.
왜냐고 물으면 대답은 늘 같다.
“예쁘잖아.”
그것이면 충분했다.
아마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내가 좋아했던 색과 그릇과 작은 장식들이 나중에 요리와 만나게 될 줄은.
나는 밥을 먹을 때도 접시를 봤다.
음식이 예쁘게 담겨 있으면 괜히 더 맛있어 보였다.
반찬을 조금 가지런히 놓은 것만으로도 식탁이 달라 보였다.
그때는 그것을 플레이팅이라고 부르는지도 몰랐다.
그냥 보기 좋은 것이 좋았다.
지금 학생들에게 음식을 가르칠 때 나는 맛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기 초록색 조금 넣어봐요.”
“그릇 가장자리는 닦아주세요.”
“음식을 가운데 몰아넣지 말고 여백을 조금 주세요.”
말을 하다 보면 가끔 혼자 웃음이 난다.
어린 시절 접시를 들여다보던 둘째딸이 지금 학생들에게 접시를 어떻게 꾸밀지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생은 참 재미있다.
그때는 아무 의미 없어 보였던 취향 하나가 나중에는 일이 되고, 기술이 되고, 나를 설명하는 한 부분이 된다.
나는 오랫동안 ‘좋아하는 것’은 그냥 취향이고 ‘잘하는 것’만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꼭 그렇지는 않았다.
자꾸 보고 싶은 것.
자꾸 해보고 싶은 것.
다른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데 나만 눈에 들어오는 것.
그런 것들이 오래 쌓이면 어느 날 나만의 감각이 된다.
예쁜 그릇을 좋아했던 마음이 플레이팅이 되었고, 음식을 먹는 사람의 표정을 보던 버릇은 학생을 살피는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세 딸의 가운데에서 배웠던 눈치와 생활력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꽤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다.
둘째라는 자리는 그렇게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언니를 보며 배우는 법.
동생을 챙기는 법.
사람 사이에서 한발 물러나 보는 법.
그러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슬쩍 챙기는 법.
지금의 나는 한식대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학생들은 나를 교수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가끔은 그 호칭보다 ‘세 딸 중 둘째 경은이’라는 말이 더 나답게 느껴진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하고, 예쁜 것을 보면 눈이 먼저 가고, 누군가 맛있게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핑크색을 보면 아직도 마음이 조금 먼저 움직인다.
어쩌면 사람은 아주 많이 변하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린 시절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가운데를 좋아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음식과 사람 사이.
맛과 아름다움 사이.
그 어딘가에서 무엇을 조금 더하면 모두가 기분 좋아질지 생각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마지막에는 예쁜 것 하나를 더한다.
꽃잎 하나.
초록색 잎 하나.
혹은 핑크색 냅킨 하나.
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고, 지금도 좋아하는 방식이다.
경은의 한마디
“좋아하는 마음도 오래 쌓이면 재능이 된다.”
오늘의 핑크 한스픈
오늘 가족과 밥을 먹는다면 한번 물어보세요.
“오늘 뭐가 제일 맛있어?”
그 대답을 기억해두었다가 다음 식탁에 살짝 올려보세요.
사람을 기억해주는 것이 어쩌면 가장 따뜻한 요리일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