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엄마의 손맛에는 계량컵이 없었다
엄마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늘 신기했다.
소금을 넣을 때도 계량스푼이 없었고, 간장을 부을 때도 눈금이 있는 컵을 찾지 않았다.
된장을 풀 때도 저울을 꺼내는 법이 없었다.
그냥 숟가락으로 한번 떠보고,
“이 정도면 되겠다.”
하며 냄비에 넣었다.
어린 나는 그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알지?’
국 한 냄비에 소금이 얼마나 들어가야 하는지, 나물을 무칠 때 참기름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엄마는 숫자를 보지 않고도 알았다.
한번은 궁금해서 물었다.
“엄마, 얼마나 넣어?”
엄마의 대답은 늘 비슷했다.
“적당히.”
그 ‘적당히’라는 말이 어린 나에게는 참 어려웠다.
한 숟가락인지, 반 숟가락인지 정확하게 말해주면 좋겠는데 엄마에게는 그런 숫자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엄마의 손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는 나물을 무칠 때도 양념을 계량하지 않았다.
나물을 한 줌 집어 들고 양을 가늠하고, 손가락으로 소금을 살짝 집어 넣었다.
참기름도 병을 기울여 한 바퀴쯤 둘렀다.
그리고 손으로 조물조물 무쳤다.
한번 맛을 보고는 말했다.
“조금 싱겁네.”
그러면 소금 한 꼬집.
“이제 됐다.”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분명 아까와 거의 달라 보이지 않는데 엄마는 아주 작은 차이를 알고 있었다.
그 한 꼬집으로 맛이 달라지는 것이 신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내가 처음 만난 손맛이었다.
어릴 때는 손맛이라는 말을 정말 손에서 특별한 맛이 나오는 것처럼 생각했다.
엄마가 하면 맛있고 내가 하면 왜 다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재료도 같은데,
양념도 비슷한데,
이상하게 맛은 달랐다.
“엄마가 한 게 더 맛있어.”
그러면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많이 해보면 돼.”
그때는 그 말의 뜻을 몰랐다.
많이 한다고 정말 맛이 좋아질까 싶었다.
그런데 내가 요리를 오래 하면서 알게 되었다.
엄마 말이 맞았다.

요리는 머리로 배우는 것만큼이나 손으로 배우는 일이 많았다.
칼을 처음 잡았을 때는 채소 하나를 써는 것도 쉽지 않았다.
힘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손가락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 두께로 잘라야 하는지 신경 쓸 것이 많았다.
하지만 계속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손이 먼저 움직인다.
팬을 들어보면 무게가 느껴지고,
반죽을 만지면 수분이 부족한지 알게 되고,
국물을 한입 맛보면 뭔가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감각은 책 한 권을 읽는다고 바로 생기지 않는다.
반복해서 만들고,
실수하고,
다시 만들면서 생긴다.
아마 엄마의 ‘적당히’도 그런 시간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엄마에게는 숟가락 하나가 계량스푼이었다.
손바닥은 저울이었고,
눈은 타이머였다.
냄비에서 올라오는 김을 보고 불을 줄였고,
익어가는 냄새를 맡고 뚜껑을 열었다.
지글지글하는 소리를 듣고 뒤집을 때를 알았다.
나는 엄마 옆에서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보며 자랐다.
엄마는 나를 앉혀놓고 요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오늘은 된장국 이론을 배우자.”
그런 날도 없었다.
그냥 매일 밥을 했다.
그런데 그 평범한 매일이 내게는 가장 오래된 요리 수업이 되었다.
요리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뒤에는 나도 계량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몇 그램.
몇 밀리리터.
몇 분.
몇 도.
정확한 기준이 있다는 것은 참 중요하다.
특히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그렇다.
학생에게
“간장은 적당히 넣으세요.”
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
“소금은 이 정도,
간장은 이 정도,
불의 세기는 이만큼.”
기준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처음 만드는 사람도 실패를 줄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주려고 한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꼭 한마디를 더한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맛을 보세요.”
레시피에 정확히 적힌 양을 넣었다고 해서 언제나 똑같은 음식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같은 무라도 수분이 다르고,
같은 배추라도 단맛이 다르다.
간장도 제품마다 염도가 다르고,
불의 세기도 주방마다 다르다.
그날의 온도와 재료의 상태까지 모두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숫자는 출발점이지 마지막 답은 아니다.
마지막에는 결국 사람이 판단해야 한다.
한입 맛을 보고,
냄새를 맡고,
재료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적당히.”
어릴 때 그렇게 답답했던 그 말이 이제는 조금 이해된다.
엄마의 손맛에는 기다림도 있었다.
밥이 뜸 들기를 기다리고,
양념이 배기를 기다리고,
국물이 충분히 우러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어린 마음에 그 시간이 답답했다.
“엄마, 다 됐어?”
“아직.”
조금 지나 또 묻는다.
“이제 먹어도 돼?”
“조금만 기다려.”
나는 냄비 뚜껑을 자꾸 열어보고 싶었다.
그러면 엄마가 말했다.
“자꾸 열면 안 돼.”
지금은 나도 같은 말을 한다.
요리에는 사람이 재촉한다고 빨라지지 않는 시간이 있다.
불을 세게 올린다고 모든 음식이 빨리 맛있어지는 것도 아니다.
천천히 익혀야 부드러워지는 것이 있고,
조금 기다려야 맛이 드는 것이 있다.
살다 보면 사람도 그런 것 같다.
빨리 결과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조금만 노력했는데도 바로 잘하고 싶고,
시작했으면 금방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요리가 알려준 것은 달랐다.
시간이 필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야 한다.
손에 익어야 하는 것은 계속 손을 써봐야 한다.
나는 요리를 오래 할수록 서두르지 않는 법도 조금씩 배웠다.
엄마가 냄비 앞에서 기다리던 모습처럼.
엄마는 음식을 만들면서 자주 맛을 봤다.
국자로 국물을 조금 떠서 후후 불고 맛을 본다.
조금 더 끓인다.
다시 맛본다.
어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까 먹었는데 왜 또 먹지?’
지금은 내가 똑같이 한다.
처음 넣은 양념이 끝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다.
물이 졸면 간이 강해지고,
채소에서 물이 나오면 맛이 연해진다.
재료가 익으면서 향도 변한다.
그래서 요리하는 사람은 계속 확인해야 한다.
어쩌면 요리는 만드는 일보다 살피는 일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손맛에는 또 하나가 있었다.
먹는 사람을 아는 것.
엄마는 가족의 입맛을 알고 있었다.
누가 매운 것을 좋아하는지,
누가 짠 음식을 싫어하는지,
누가 국물을 좋아하는지.
같은 음식을 만들면서도 가족에게 맞게 조금씩 조절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엄마라면 원래 다 아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오래 보고,
기억하고,
마음을 써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그 한마디 안에는 꽤 오랜 관찰이 들어 있었다.
나는 요리를 오래 하면서 손맛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손맛은 단순히 계량하지 않고 요리하는 능력이 아니다.
재료를 만져보고,
상태를 살피고,
맛을 확인하고,
먹는 사람까지 생각하며 마지막 한 꼬집을 결정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수많은 끼니가 쌓여 만들어진다.
엄마는 가족을 위해 몇 번이나 밥을 했을까.
몇 번이나 국을 끓였을까.
몇 번이나 나물을 무쳤을까.
그 시간을 생각하면 엄마의 손이 왜 그렇게 정확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너무 자연스럽게 먹었다.
국이 있으면 먹었고,
반찬이 있으면 젓가락을 뻗었다.
그 한 끼를 만들기 위해 누가 장을 보고,
씻고,
다듬고,
불 앞에 서 있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 직접 가족의 밥을 만들고 다른 사람의 음식을 만들면서 그 시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밥 한 끼에는 생각보다 많은 손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은 평범한 집밥을 보면 마음이 조금 달라진다.
소박한 나물 한 접시도 쉽게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간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엄마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계량스푼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소금을 손끝으로 한 꼬집 집는다.
국을 끓이다 국자로 맛을 본다.
그리고 혼잣말을 한다.
“조금 부족한데.”
아주 조금 더 넣고 다시 맛본다.
그럴 때 문득 웃음이 난다.
‘나도 엄마처럼 하고 있네.’
어릴 때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 손동작이 어느새 내 손 안에도 조금 들어와 있었다.
물론 내 음식이 엄마 음식과 똑같지는 않다.
엄마에게 엄마의 맛이 있듯,
나에게는 나의 맛이 있다.
나는 음식의 색을 조금 더 보고,
그릇을 고민하고,
마지막 플레이팅까지 신경 쓴다.
하지만 내 요리의 가장 깊은 곳을 따라가다 보면 엄마의 부엌이 나온다.
냄비에서 올라오던 김.
도마 위의 채소.
엄마 손끝의 소금 한 꼬집.
“조금만 기다려.”
하던 목소리.
그 장면들이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다.
요리는 그렇게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의 손에서 딸의 손으로.
그리고 딸의 손에서 다시 학생들의 손으로.
방법은 달라지고 도구는 좋아졌지만 음식에 마음을 담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학생들에게 정확한 계량을 가르친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학생들도 자신만의 ‘적당히’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숫자를 모르기 때문에 적당히가 아니라,
충분히 배워서 몸이 기억하는 적당히.
그것이 진짜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엄마에게 레시피보다 장면을 더 많이 물려받았다.
국자로 간을 보던 모습.
손으로 나물을 무치던 모습.
음식이 익기를 기다리던 모습.
가족들이 밥을 먹는 것을 바라보던 모습.
숫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장면은 여전히 선명하다.
아마 손맛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레시피 종이에 적혀 있지 않아도 한 사람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다음 음식으로 이어지는 것.
엄마의 손맛에는 계량컵이 없었다.
대신 시간이 있었다.
반복이 있었다.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이제야 그 ‘적당히’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요리를 하다가 마지막 한입을 맛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됐다.’
바로 그 순간,
내 손에도 엄마에게서 이어진 작은 손맛 하나가 생기는 것 같다.
경은의 한마디
“손맛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만들고 오래 바라보고 오래 사랑한 시간이 손끝에 남은 것이다.”
오늘의 핑크 한스푼
오늘 요리를 할 때는 레시피의 숫자만 보지 말고 음식도 한번 바라보세요.
냄새를 맡고,
한입 맛을 보고,
재료가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세요.
정확한 계량으로 시작하되 마지막에는 내 감각을 조금 믿어보는 것.
엄마의 ‘적당히’처럼, 나만의 감각을 한스푼 더해보세요.
그 작은 경험이 언젠가 나만의 손맛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